[1회]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계획
[2회]
유대인과 교회 -주께로 돌아가자-
[3회]
바벨탑과 성전
[4회]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1)
[5회]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2)
[6회]
그리스도를 못 박은 유대인들에게 임한 재앙
[7회]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와
요세푸스의 연설
[8회]
주후 70년 이후의 유대인들
[9회]
부패한 십자군
[10회]
여호와의 증인 - 유대인
[11회]
여호와의 증인 - 이스라엘
[12회]
유대인의 두 줄기
[13회]
아우슈비츠(Auschwitz) 1
[14회]
아우슈비츠(Auschwitz) 2
[15회]
제 2차 세계대전_1
[16회]
제 2차 세계대전_2
[17회]
이스라엘의 독립
[18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1
[19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2
[20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3
[21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4
[22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5
[23회]
아랍 국가 간에 맺은 반 테러 조약
[24회]
종교를 보면 세계가 보인다
[25회]
하나님의 포도원_1
[26회]
하나님의 포도원_2
[27회]
중동전쟁
[28회]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 종파들
[29회]
세 종류의 이스라엘
[30회]
선민의 분열, 유수(幽囚), 귀환
[31회]
예루살렘의 멸망
[32회]
두 개의 이스라엘
[33회]
이스라엘의 부활
[34회]
이스라엘의 회복
[35회]
이스라엘의 의미
[36회]
사도 요한과 신약성서
 
성경과 역사 :: [19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2


세계적인 사건과 시온주의자들의 필요가 가장 적절한 시기에 서로 맞아 떨어져 5차례에 걸친 이민 파동이 성공적으로 추진된다. 첫 이민은 1880~ 1900년에 있었고 대부분 이민자들은 토지 경작자로 기초를 다진다. 두 번째 이민 파동은 1900~1914년에 이루어지고 농학자와 노동자들이 유입되어 이곳의 농업을 발전시킨다. 3차 이민 파동은 1918~1924년에 전개되고 젊은이, 기업가, 투자자들이 유입되어 도시를 건설하여 산업, 군대, 교육 기관을 설립한다. 4차 이민파동은 1924~ 1939년에 발생하고 지식인, 전문직, 관료들이 각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유대인들은 군대를 조직하고 국가를 위한 청사진을 가지게 되었다. 생존을 위한 관념이 생존의 도구로 변하게 되었다.

시온주의라는 이념에서 이스라엘을 실현시키기까지의 연쇄작용은 1860년경 시작된다. 당시에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야적 개념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변화는 중세시대의 유대인 배척운동에서 근대의 반유대주의로의 변화와 함께 발생했다. 유대 지식인들은 유대인 배척운동과 반유대주의 간의 차이점을 연구하고 도피처를 찾아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도망간다고 해서 평화로운 삶을 영유할 수 없으며 독립 국가를 세워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시온주의자들은 하나님은 굴욕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자립하는 유대인을 원한다고 가르쳤다.

디아스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여정은 1860~1900년까지 발행된 일련의 책에 포함된 이념들로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최초의 서적은 모세 헤스(1812~1875)가 1862년에 집필한 <로마와 예루살렘>이라는 예언적인 제목이 붙어 있는 강경한 유대 서적이다. 잘 생기고 성질이 불 같은 헤스는 창녀와 결혼하여 정통 유대 전통에 저항하였다. 비참하리라는 예측과는 달리 그는 부인과 행복하게 살았고 부인은 전에 전혀 몰랐던 관념의 세계에서 이상한 삶을 살고 있는 이 생소한 유대인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스피노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은 헤스는 일찍이 1841년 인도주의적 유럽 합중국을 역설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얼마 동안 마르크스, 엥겔스와 교분을 가졌다. 그는 1848년 독일 혁명에 가담했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파리로 탈출했다.

헤스는 공산주의의 유물론적 역사 해석과 계급투쟁 개념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좌익 운동과 결별하고 유대교로 복귀하여 유대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새로운 그의 인식의 결과로 <로마와 예루살렘>이 집필되었고 이 관념은 시온주의의 탄생을 부채질하고 미래의 시온주의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책에서 헤스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디아스포라 유대주의의 정신적 중심지를 창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관념은 역시 정통파와 결별한 러시아 출생 페레츠 스몰렌스킨(1841~1885)에 의해 정리되고 세련되어진다. 11세에 스몰렌스킨은 “챠퍼”에 의해 형이 러시아 군대에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12세에 그는 탈무드를 죄다 외웠고 유대인 촌락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집을 떠났다. 12년 동안 그는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고 25세에 비엔나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곳에서 지식인 대접을 받았다. 그는 히브리 월간지를 발행했다. <영원한 사람>이라는 유명한 글을 발표하여 유대인은 지성인들이고 히브리어로 단결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유대인의 지성적 가치관은 언젠가는 소중한 인류의 가치관이 될 것이고 팔레스타인은 다시금 유대인의 천재성이 발휘될 수 있는 세계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880년대에 랍비 사무엘 모힐레버(1824~1898)와 같은 시온주의 지식인들은 시온주의 동기유발자가 된다. 모힐레버는 첫 시온주의 이민운동을 전개하고 정치적인 행동 조직체를 만들었다. 이 조직의 행동 강령은 팔레스타인의 토지를 구매하여 회원들에게 주었고 슬로건으로 “러시아와 폴란드 유대인 촌락에 메아리치는 팔레스타인 행”을 내걸었다.

시온주의자들은 하이칼라 지식인 유다 핀스커(1821~1891)를 영입하게 된다. 그는 러시아 군 의료단으로 복무했었다. 오뎃사에서의 대량학살을 목격한 핀스커는 유대인과 러시아인들이 인종 차별을 폐지할 것을 역설하면서 동화정책은 반유대주의에 대한 쓸데없는 선전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자동적인 해방>이라는 책자로 그는 유대인들이 지리적으로 독립을 추구해야 하고 유대의 민족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반유대주의는 이주를 통해 한 나라의 소수 민족에서 다른 나라의 다수 민족이 된다고 해도 그 위험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로마시대에 랍비 힐렐이 역설했던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해 줄까?”라는 투쟁 구호를 제창한다. 이 말은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대신 두발로 일어서서 싸우라는 요구이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지고 데오도르 헤르즐(1860~1904)이 현대적 의미의 시온주의 기초를 세우게 된다.

헤르즐은 부호이고 반쯤 동화된 유대 가족의 방탕한 아들로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하고 호화스러운 독일 문화가 충만한 분위기에서 성장한다. 그는 어머니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으며 어릴 적 친구로는 그의 누이밖에 없었다. 그는 괴테, 나폴레옹, 비스마르크를 숭상했으며 비엔나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기자가 된다.

아주 잘 생기고 미소를 짓고 있지 않으며 우아한 양복을 걸치고 있는 예언자 같은 그의 초상을 보고는, 그가 젊었을 때 성공한 극작가였고 부인들이 젊은 바람둥이의 유혹을 받으며 남편은 공처가로 등장하는 여성스러운 침실 희극을 쓰는 작가였다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신문기자로 헤르즐은 오만하고 냉소적인 문학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으며 비엔나 사교계에서 총애를 받았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 크라상 빵과 커피를 먹으면서 헤르즐의 글을 읽었다.

그의 일생에 전환기가 된 것은 드레퓌스 사건이다. 헤르즐은 프랑스로 파견되어 이 유명한 사건 취재를 맡았다. 그는 처음에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무죄임을 확신한 후부터 그는 친 드레퓌스 측에 적극 가담한다. 일반적으로 그가 드레퓌스 사건으로 처음 반유대주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실제로 반유대주의는 헤르즐이 가지고 있던 문제 중의 하나였고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그는 자신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처음으로 그는 반유대주의가 사회구조에서 생겨난 것이고 개별적 구원은 개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식한다. 일단 자신이 유대인이고 유대교를 믿는다고 공표하자 그는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진다. 그가 유대인 생존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자 모든 오만함과 위선을 버리게 된다. 프랑스 폭도들이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라고 소리치자 그는 즉시 <유대국가>라는 책을 집필하고 1896년에 이를 출판했다. 이 얇은 책에서 그는 시온으로 돌아가기를 갈구하는 메시야적인 소원을 정치 세력으로 변화시키면서 시온주의를 구체화시킨다. 이 책은 유럽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헤르즐은 국제 시온주의 운동 조직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역사적인 1차 시온주의 의회를 소집한다. 환호하는 대표단에게 헤르즐은 시온주의 운동은 “공공의 법으로 보호를 받으며 유대인들을 위해 팔레스타인에 고향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설파한다. 시온주의는 개별적으로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으로 조금씩 이주하는 것이 아니라 농부, 노동자, 기업가, 학자, 지식인의 대규모 이민 운동이었다.

거시적으로 보아 세상은 바젤에서 개최된 시온주의 회의에 무관심했다. 세계 언론은 이 회의가 단지 제 정신이 아닌 유대 단체가 회의를 개최한 것으로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는 로마에 항거한 바르 코흐바 시절에 사용하던 유대 동전을 복제하여 사용하는 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젤 회의는 다수의 유대인에게 큰 열기를 조장시켰다. 부자, 동화된 유대인들은 헤르즐과 그의 시온주의 개념을 배척하고 많은 개혁 랍비들은 그를 공격했다. 그러나 빈곤하고 무지한 정통파 유대인들은 그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헤르즐이 동유럽의 가난하고 학대받은 정통파 유대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힘이 무엇이었을까? 이 힘은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먼저 황야가 아닌 유대 국가로의 유대인의 자발적 대탈출이라는 헤르즐의 개념에는 커다란 포부와 위엄이 있었다. 이들 유대 국가에서 유대인의 목소리를 세계 만방에 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의 접근 방법에는 충동적인 근엄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즉 우려나 걱정을 배제하고 세부 사항은 과감하게 무시하고 있다. 헤르즐의 시온주의는 세부적인 프로그램이 아니고 완전한 개념이었다. 동구 유럽에서 핍박받던 유대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국가와 자신을 결부시키면서 직접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끝으로 헤르즐 개인이 큰 응집력을 주었다. 그의 당당한 모습, 상대방을 압도하는 외모, 궁중의 문을 두들겨 여는 오만한 행동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헤르즐은 이미 미래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 “헤르즐 왕”으로 불리고 있었다.

헤르즐은 사망 직전에 큰 실수를 했다. 이런 실수가 다른 사람에게는 치명적이 될 수 있었지만 그의 명성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속적인 외교를 통해 유대 국가를 쟁취할 수 있다는 헤르즐의 동기 유발자와 굴복하지 않고 어깨에 총을 메고 싸워서 팔레스타인 독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시온주의 선동가들 간에 분열이 생긴다. 1903년 회의에서 헤르즐은 시온주의자는 팔레스타인을 버리고 우간다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분노를 야기시킨다. 위대한 헤르즐이 반역자로 비난을 받게 되고 자신의 실수를 인식한 그는 통일 시온주의 조직을 위해 반대 세력에 가담한다. 그는 이듬해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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