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계획
[2회]
유대인과 교회 -주께로 돌아가자-
[3회]
바벨탑과 성전
[4회]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1)
[5회]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2)
[6회]
그리스도를 못 박은 유대인들에게 임한 재앙
[7회]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와
요세푸스의 연설
[8회]
주후 70년 이후의 유대인들
[9회]
부패한 십자군
[10회]
여호와의 증인 - 유대인
[11회]
여호와의 증인 - 이스라엘
[12회]
유대인의 두 줄기
[13회]
아우슈비츠(Auschwitz) 1
[14회]
아우슈비츠(Auschwitz) 2
[15회]
제 2차 세계대전_1
[16회]
제 2차 세계대전_2
[17회]
이스라엘의 독립
[18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1
[19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2
[20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3
[21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4
[22회]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_5
[23회]
아랍 국가 간에 맺은 반 테러 조약
[24회]
종교를 보면 세계가 보인다
[25회]
하나님의 포도원_1
[26회]
하나님의 포도원_2
[27회]
중동전쟁
[28회]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 종파들
[29회]
세 종류의 이스라엘
[30회]
선민의 분열, 유수(幽囚), 귀환
[31회]
예루살렘의 멸망
[32회]
두 개의 이스라엘
[33회]
이스라엘의 부활
[34회]
이스라엘의 회복
[35회]
이스라엘의 의미
[36회]
사도 요한과 신약성서
 
성경과 역사 :: [14회] 아우슈비츠(Auschwitz) 2


뮌스터 대학의 교수이자 아우슈비츠 나찌 친위대의 의사였던 요한 파울 크레머는 1942년 9월 2일을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새벽 3시 특별한 행사 때 처음으로 나는 그곳에 있었다. 단테의 지옥은 이에 비하면 우습다.”
3일 후 클레머는 네덜란드로부터 호송선 색출에 책임을 맡은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록했습니다.
“나찌의 친위대는 1/5리터의 보드카와 담배 다섯 개비, 100그람의 소시지와 빵을 받기 위해 기꺼이 이 일을 했다.”
캠프의 책임자 헤쓰는 나찌 친위대의 역할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차는 하나 둘씩 차례로 비워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짐을 치워야 했고 그 움직임을 보고 나찌 친위대의 의사들은 노동에 적합한 사람을 뽑아냈습니다. 일에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은 호송선에 실려온 사람 중 25-30%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대인은 단지 그들 중 15%에 불과했습니다. 단테의 작품에서 묘사되었던 지옥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돌프 헤쓰는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 여자 따로따로 나뉘어 유대인들은 죽어가야 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즉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기본적이고 부분적인 목격자의 증언과 기록은 남아있습니다.”
시인 의사 한제스드릭센과 전쟁 전 프랑스 수상의 형제였던 레네 블룸, 카톨릭 수도사이자 후세로 교수의 조수인 에디트 스타인도 희생자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위첼의 자매와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희생자들의 수가 수백인지 수천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 그들의 최후였습니다. 화장된 재는 온 들판에 퍼져있고 연못에도 뿌려져 있어 그들의 흔적으로 가득했습니다.



재가 뿌려지고 나면 귀금속과 그들의 물건들은 나찌 친위대의 국고로 회수되었습니다. 희생자들은 속아서 가재도구와 귀중품을 바치기 위해 동쪽에서부터 최후의 여행을 떠나온 것입니다. 이들은 ‘캐나다의 창고'라 불리는 캠프에 도착했습니다.

아마도 캐나다가 부와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곳에는 수백명의 죄수들과 이를 관리하는 30여명의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의류와 신발과 시계, 안경들은 집에 있는 이들과 최전선에 있는 군인을 위한 것이고 금과 보석들은 나찌 친위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물건들은 재생하게 됩니다. 시체를 화장시키고 난 재도 거름으로 쓰였습니다. 캠프가 없어질 때까지 캐나다 창고는 가득 차 있고 그 부지의 일부는 현재 아우슈비츠 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폴란드 정부에 의해 국가기관으로 설립된 박물관은 당시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어린 소녀의 머리카락이 잘려져 있는 것보다 더 슬픈 광경은 없습니다. 아직도 섬세한 소녀의 온기가 남아 있는 곱슬머리….
그들은 그들의 재로 독일의 생활 공간을 윤택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1943년 1월 29일 집시들을 아우슈비츠로 이송시키고 B2E구역에 정착시키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 남은 21,000명의 집시들이 등록을 했습니다. 그들은 배고픔과 추위와 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살아남은 3,000명 가량은 1944년 8월 2일에 가스실에서 죽어갔습니다.

수용소의 질서가 충분히 잡혀있지 않았지만 1940년 8월 법률집행소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과 성직자들이 집행소에 먼저 배치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정치범들과 수용소의 저항운동에 참여한 이들이나 도주를 기도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여기서 죄수들은 그들의 출신과 신념과 사상들을 반납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에 배치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땅 경작과 우물의 물 퍼내는 것, 도로 만드는 것과 같은 작업입니다. 법률집행소의 관리자들은 SS군대 중에 가장 무지막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법률집행소에 배치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1942년 6월 10일 법률집행소로부터 도망치려는 필사적인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그 집행소의 대부분을 구성하던 폴란드인들이었습니다. 9명이 각각 서로 도주했으며 나머지는 독일군에게 처형당했습니다.

몇몇 구역들은 특별히 끔찍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예로 ‘비르켄나우'의 여자 수용소도 25구역에 있습니다. 여자들이 아프거나 일을 할 수 없을 때 그곳에 보내졌는데 그것은 사형선고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이곳 가스실에서 공간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음식도 물도 받지 못했습니다.

메인캠프에서 11블럭은 죽음의 구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캠프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 수행되는 감옥이었습니다. 사일리지아의 게쉬타포 법정도 사일리지아로부터 온 죄수들에게 평결을 내렸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내려지는 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사형. 법정의 웃지못할 희극은 피고의 신원 파악에 필요한 만큼의 시간만 소요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필요한 전부였습니다.



매일매일 이러한 위대한 행위와 이타주의적 일들이 있었습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아우슈비츠를 방문했을 때 그는 비신앙인을 포함해서 서로 다른 신앙과 이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진정으로 위해 주었던 모습에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3년 후 요한 바오로 2세는 맥시밀리안 콜베르트에게 죽음보다 더 강한 인간 존엄의 영원함을 기리기 위해 성인 칭호를 내렸습니다. 콜베르트는 죽음의 시각을 앞두고 그들의 동료들에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나는 7월30일 화형 선고를 받아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무죄인 것을 알면서도 우리 중 58명과 10명의 여자도 이곳에서 죽게 됩니다. 내 딸 룰루니아에게 얘기해주세요. 너희 아빠는 더 이상 있지 않다고.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내 딸,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 룰루니아가 주 안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제발 나를 잊지 마오.”

죄수 캠프 내의 병원은 그들에게 죽음으로부터 치료도 보호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나찌 친위대의 의사들은 병도 병약한 사람들의 심장에 페놀을 주사하여 죽게 만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갔습니다. 의사들은 실험시키고 죽였습니다. 조세프 멘켈리 박사는 유전학상으로 임산부들과 신체적 문제점을 살아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칼클라우버그 교수는 여자들을 빨리 불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지시받았습니다.

유대인 포로들이 찍은 대량학살의 과정을 보여주는 세계의 주목할만한 사진이 수용소로부터 몰래 빼어져 남겨져 그들의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폴란드 저항운동단의 구성원들이 수용소로 음식을 들이고 약을 나누어주고 선전문이나 편지를 통해 용기를 북돋아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발각된다면 단지 하나의 벌만이 있을 뿐입니다. 목숨을 부지했거나 포로를 도운 그들의 가족들 중에는 야니카카이토르프, 뒤쉬히 부부, 안나브리티코바, 마리아 보브제츠카 등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인으로서 SS병원의 간호사였던 마리아 스트링버거는 자신은 저항가의 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런던으로 망명한 폴란드 정부는 수용소에 관한 보고서를 아우슈비츠 뿐 아니라 나찌의 모든 수용소와 감옥을 알리려고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민족 학살의 사실을 연합군이 공중에서 찍은 사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들은 최근에 역사가들에 의해 연구되어지고 있고 당신은 명백하게 수용소들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1944년 하반기에 폴란드 군이 영국으로부터 수용소 저항운동대에 낙하산 병을 보냈습니다. 가명으로는 오르반이라고 하는 스티븐우르샤인스키 중위는 캠프 내의 반란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인지 검토했습니다. 그의 종말은 비극적이었습니다. 사형집행소에서 해방의 날 바로 며칠 전에 처형당했습니다.
역사적 정의와 공정성에 근거한 인간 존엄성과 믿음의 힘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후손들에게 유대인 화형의 역사가 전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주어졌던 운명, 전쟁이 끝난 후 화장터의 폐허 속에 숨겨졌던 사실들이 기록으로 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순교자들 뿐만 아니라 동료 죄수들이 어떠한 상태였는지도 기록했습니다. 1944년 10월에 발생했던 독일인들의 제 4 화형장 폭발을 보복하기 위한 그들의 보복은 실로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양키 한딜스먼은 무시무시한 포격에 의해 죽었습니다. 로사 로베르타와 6명의 유대인들은 훔친 폭약을 반란군에게 전하다가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싸웠습니다. 1945년 1월까지 그 행진의 마지막 목격자는 아우슈비츠에 남겨졌습니다. 나찌는 부역노동을 했던 사람들과 그들 범죄의 목격자를 처단했습니다.

히틀러 집권 당시, 그는 성공에 들떠 이렇게 발표했었습니다.
“우리가 성공하는 것은 곧 독일에 새 이념을 심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가 초래한 것은 죽음, 셀 수도 없는 남녀와 아이들의 죽음이었습니다.
1945년 소련군의 공격으로 도살장의 생존자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는지 정확히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곳에 실제로는 이해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수치는 아우슈비츠의 비극과 그 끔찍했던 기억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인간 본성이 말살된 사람들에 의한 희생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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